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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고추 장사의 진짜 생리: 왜 농협은 고추를 쌀때사서 비쌀때 팔지 못할까?

읽는 시간 약 5분

들어가며: 이사회에서의 치열한 공방전

앞서 건조기 축이 부러지는 아찔한 위기를 극적으로 넘기고, 도의원님의 도움까지 더해 극적으로 100톤의 건고추 수매 자금을 확보했을 때의 안도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장의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기업이나 조합 경영의 세계는 늘 내부의 보수적인 벽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건고추 100톤을 본격적으로 수매하겠다고 나서자, 조합 내부의 반응은 생각보다 싸늘했다. 오랫동안 농협에 몸담아 온 직원들과 이사들은 고추 장사의 생리를 전혀 모른 채 탁상공론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사회에 수매 안건을 올리자마자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 많은 물량을 어디다 팔 계획이 있느냐”, “구체적인 판매 계획과 확실한 거래처가 확보되지 않으면 수매를 승인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대표이사인 내가 직접 나서서 고추의 유통 구조와 향후 시장 전망을 차근차근 설득해야만 했던 이유다.

왜 농협은 고추를 쌀때사서 비쌀때 팔지 못할까?

우리가 몰랐던 고추 장사의 진짜 생리: 햇고추와 건고추의 비밀

나 역시 시골에서 자라며 평생 고추를 보고 자랐기에 고추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대표이사로 직접 공장을 운영하고 고추 장판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고추 유통의 진짜 생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가장 큰 오해는 고추를 농산물 일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

고추 시장에는 크게 두 가지 기준이 존재한다. 바로 ‘햇건고추’와 ‘건고추’다. 소비자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고추는 몇 년산인지 그 ‘년산’ 자체는 실질적인 유통에서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고추는 통째로 건고추 상태로 보관될 때와, 이를 분쇄하여 고춧가루로 만들어 봉투에 포장할 때의 시간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고춧가루는 분쇄되어 포장된 시점부터 유통기한이 1년으로 산정되지만, 튼실하게 잘 말려진 ‘건고추’ 형태로는 일반 건조 창고에서도 수 년간 거뜬히 보관하며 장사하는 상인들이 부지기수다.

농협의 숨겨진 무기: 냉장창고와 10년 보관의 가능성

일반 상인들도 건고추를 몇 년씩 묵혀가며 시세를 조율하는데, 하물며 전국 각지의 농협이 가진 인프라는 이보다 훨씬 강력하다. 농협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대규모 냉장창고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농협의 냉장창고 시스템을 활용하면 건고추는 10년은 족히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구조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아는 이들을 현장에서 거의 보지 못했다. 이 기준에서 바라보면, 농협이 할 수 있는 사업 중에 고추 장사만큼 확실하고 유리한 구조도 드물다. 누구나 아는 상식인 “쌀 때 사서 비쌀 때 판다”는 경제 원칙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품목이 바로 고추다. 농협은 이 구조를 실현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고추는 당장 내다 팔아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수매의 허와 실, 그리고 농협이 나아갈 길

그동안 고추 가격이 폭락하는 해가 오면 정부는 어김없이 정부수매를 시도했다. 정부가 직접 사들이거나 농협에 수매를 위탁하여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관행은 정부수매 문서가 내려오면 그에 맞춰 물량을 사서 차에 실어 보내는 것으로 업무를 마감하는 수동적인 구조에 불과했다. 결국 그렇게 해봐야 남 좋은 일만 시킬 뿐, 지역 농협의 실속이나 장기적인 자립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격이 폭락하는 해라는 것은 거꾸로 말해 농가에 고추가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정부수매 물량을 소화하고도 농가에는 훨씬 더 많은 양의 고추가 남아돌게 된다. 바로 이때가 농협이 움직여야 할 골든타임이다. 정부수매를 소화함과 동시에, 농협이 자금력을 동원해 필요한 양만큼의 우수한 건고추를 직접 매입하여 냉장창고에 차곡차곡 재워두는 것이다. 요즘 농협들은 냉장창고 여유 공간도 충분하고 자금력도 갖추고 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마치며: 발상의 전환이 가져올 농협 고추 사업의 미래

이사회에서는 구체적인 판매 계획이 없다는 이유로 고추 수매를 반대했으나, 대표이사의 설득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돌파했다.고추는 분쇄 시점에 유통기한이 시작되지만, 통째인 건고추 상태로는 수년 이상 보관이 가능하다.농협이 보유한 대규모 냉장창고를 활용해 쌀 때 사서 비쌀 때 파는 전략을 취한다면, 고추 장사는 농협에게 가장 유리한 사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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