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가을, 리어카에 고추 싣고 춘양장으로 향하던 날
들어가며: 1985년의 가을바람과 시골 장터의 기억
세월이 흘러 강산이 변해도 문득문득 가슴 한구석을 먹먹하게 만드는 시절이 있다. 바야흐로 1985년의 가을, 경북 봉화의 좁은 신작로에는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덜컹거리는 리어카 바퀴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온 가족이 봄부터 더위와 가뭄을 견뎌내며 땀 흘려 가꾼 붉은 결실을 바짝 말려 자루에 가득 담고, 장에 내다 팔기 위해 길을 나서던 그 시절의 풍경은 우리네 부모님들이 살아낸 치열한 삶의 역사 그 자체였다.
내가 훗날 농협봉화군조합공동사업법인 대표이사로 수년 동안 현장을 이끌며 수많은 원물과 가공 공정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 1980년대의 거친 장터 바닥에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농민의 마음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화려한 대형 마트와 포장 기술이 없던 1985년, 춘양장을 향하던 리어카 위에는 어떤 사연들이 담겨 있었을까.

“제발 한 근에 2,000원은 받아야 하는데…”
1985년 당시 물가와 농산물 시세를 떠올려보면, 농가 가계 경제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생명줄이 있었다. 장날이 서는 날이면 새벽부터 춘양장 어귀는 자리를 잡으려는 농민들과 상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반듯하게 햇볕에 잘 말려낸 붉은 자루를 리어카에서 내려놓고 자리를 펴는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고단함과 함께 깊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올해는 비가 잦아 농사일이 참 힙들었으니, 제발 한 근에 2,000원 톡톡히 받아야 빚을 갚고 자식들 공책이라도 한 권 더 사줄 텐데…”
자루를 조심스럽게 풀러 붉은 빛깔을 확인하던 어르신들의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1985년의 2,000원이라는 돈은 단순히 숫자의 의미를 넘어, 1년 동안 농사를 짓기 위해 빌려 썼던 융자금을 갚고 겨울을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거친 장터 바닥에서 다른 영농 자재 값은 오르는데 흥정이 뜻대로 되지 않아 한숨을 내쉬던 부모님들의 뒷모습은 그 시절 농촌이 짊어진 무거운 짐이었다.
춘양장의 붉은 자루와 봉화 고랭지의 긍지
당시 춘양장에 모인 생산물들은 지금처럼 기계화된 대형 포장지에 담겨 있지 않았다. 마대 자루나 누런 종이 포대에 무쇠처럼 단단하게 말린 농산물을 가득 담아 어깨에 메고 나왔다. 비록 투박한 모양새였지만, 북으로는 영월, 남으로는 영양과 인접한 봉화의 300~600고지 고랭지에서 자라난 결실들은 어디 내놓아도 밀리지 않는 옹골찬 품질을 자랑했다.
일교차가 심하고 물 빠짐이 좋은 배산임수 지형에서 자란 덕분에, 1985년 그 시절의 춘양장 작물은 껍질이 두텁고 진한 향을 장터 공기를 가득 채웠다. 상인들이 손으로 집어 부서뜨려 보며 “역시 이 동네 것이 맵고 야물딱지다”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면, 리어카 옆에 지키고 서 있던 농민들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미소가 번지곤 했다.
과거의 리어카 행렬에서 현대적 유통으로 이어지는 길
1985년의 춘양장에서 리어카를 끌고 한 근 가격에 마음 졸이던 농민들의 간절함은,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농업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손으로 직접 말리던 전통 방식의 한계를 넘어 더 위생적이고 체계적인 건조와 가공 방식을 고민하게 된 계기도 바로 그 시절 현장의 아쉬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시계 바늘은 흘러 그때 그 리어카 행렬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춘양장 아스팔트 바닥에 새겨진 농민들의 땀방울과 묵직한 기억은 오늘날까지 우리 농산물의 가치를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로 남아 있다.
마치며: 1985년의 땀방울을 기억하며
1985년 가을, 봉화의 농민들은 바짝 말린 자루를 리어카에 싣고 새벽 안개를 뚫으며 춘양장으로 향했다.당시 농민들에게 한 근에 2,000원을 받아야 한다는 바람은 한 해 농사의 빚을 갚고 가족의 생계를 지키기 위한 간절한 희망이었다.투박한 마대 자루에 담겨 나왔던 춘양장의 결실은 고랭지의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며 옹골차게 자란 우리 농민들의 땀방울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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